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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당 전자광·박미옥 대표
<7전8기 역경 뒤집記>
기사입력 2018.05.15 11:17:13 | 최종수정 2018.05.15 11: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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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미미당> 전자광·박미옥 대표



탁류의 고장 전북 군산이 전자광(56) 대표의 고향이다. 부친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1950년 개전 초부터 종전까지 숱한 전장을 누볐다. 치열하기로 유명했던 전투에는 모두 참가했다.
살아 돌아온 것을 본인도 신기해 할 정도였다. 전쟁터에서 생존과 살육의 시간을 보낸 아버지의 내면은 피폐해졌다. 전쟁 트라우마로 정상적 생활이 어려워진 아버지는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다. 모친과 7남매의 고생은 극심했다. 설상가상 차남이었던 전 대표는 5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러나 그의 생은 마비될 수 없었고 마비되지 않았다.









장애로 철학에 심취했던 청년에게 다가온 사랑

학령기가 되자 학업은 검정고시로 대체했다. 그 대신 책을 많이 읽었다. 청소년 시절 그는 인간 고통의 근원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 해결책에 갈증을 느꼈다. 자연스레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동양철학에 끌렸고 노자와 장자를 편력했다. 스무 살 무렵엔 군산 은적사나 모악산 대원사의 호탕한 스님들과 교유하며 술을 배우고 연애를 배웠다. 역설적으로 인생의 쓰고 단맛을 속세가 아닌 사찰에서 배운 것이다. 20대 후반엔 몹시 아프고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그때 처음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 뒤 10년간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스물두 살에 익산으로 와서 오락실을 2년간 운영했다. 이때 기반을 잡아 금은방을 차렸다. 금은방을 10년간 운영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돈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금은방은 전 대표에게 큰돈보다 훨씬 소중하고 어마어마한 가치를 남기게 해줬다. 그곳에서 지금의 부인 박미옥 대표를 만났다. 보석상 10년 동안 가장 빛나고 값진 ‘미옥’이라는 구슬을 얻은 것이다. 전 대표는 29세였고 박 대표는 23세로 당시 대학교 3학년 사학과 학생이었다.

어느 날 회중시계를 가져와 수리를 부탁했다. 너무 낡아 수리가 불가한 상태였다. 전 대표는 못 고친다고 돌려보낼 수도 있었지만 일단 “고쳐볼 테니 두고 가라”고 했다. 사실 박 대표는 이미 여러 시계방을 다니면서 못 고친다고 퇴짜를 맞은 상태였다. 그녀 입장에서는 수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 반가웠다. 그 뒤 4학년에 되어 교생실습을 나갈 무렵 이모님으로부터 찌그러진 반지를 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실습기간이 끝나는 대로 전 대표의 금은방에 가지고 가서 수리를 의뢰했다. 반지를 펴는 동안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박 대표는 전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었구나!’하며 내심 반가웠다. 그의 깊고 해박한 생각들에 매료됐다.

얼마 후 두 사람의 도반 관계는 남녀 관계로 발전했고 사실혼 관계에 들어갔다. 박 대표의 친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착하고 곱게 자란 모범생 큰딸이 어느 날 집에도 오지 않고 장애를 가진 청년과 동거를 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 아팠지만 박 대표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했다.

“아내는 순수하고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해심도 많고요. 제게 무척 헌신적이었습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 제 밥상을 정성껏 차려줬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무척 미안하고 안쓰러웠어요. 10년간 처가 어른들께서 연락을 끊으셨지요. 저는 서운하기는커녕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국밥집으로 외식업계 데뷔, 쓴맛 단맛 골고루 맛봐

금은방을 10년 정도 하고 나니 권태롭기도 했고 비전도 없어보였다. 당구장 사업이 더 유망해보였다. 금은방을 정리하고 영업이 잘 되는 당구장을 인수했다. 그러나 당구장도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수한지 3년 만에 당구장을 정리했다. 당구장 영업도 부진했지만 부진을 만회하고자 시작했던 주식투자에서 탈이 났다. 짧은 시간에 주식을 사고파는 단타 매매로 투자를 했다. 벌충은커녕 그동안 번 돈마저 거의 잃었다.

1999년 겨우 전세금만 남겨 광주 풍암동으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막막했다. 박 대표는 포장마차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전 대표 생각에 포장마차는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잘되어봤자 포장마차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의논 끝에 돼지국밥집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식당운영 방법과 조리를 배우려고 했지만 어떤 식당에서도 안 가르쳐 줬다. 박 대표가 6개월 동안 계량저울에 식재료 양을 측정해가면서 스스로 레시피를 개발했다. 메뉴 개발이 끝나자 132㎡(40평) 정도에 15개 테이블로 시작했다. 당시 풍암동은 미개발지역으로 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식당 문을 열었으나 6개월간 썰렁했다. 맞은편에 있었던 유명 국밥집은 문전성시를 이뤄 큰 대조를 보였다. 어쩌다 오는 손님들마다 “앞집에 가서 좀 먹어보라”며 조언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충고를 해줬다.

이후 끊임없이 국밥 수준을 높였더니 6개월 후부터는 손님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돼지국밥뿐 아니라 전골과 막창구이 등도 차츰 손님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하루 매출액이 200만원을 웃돌기도 했다. 특별히 메뉴를 전수받거나 벤치마킹을 한 것도 아니었다. 절박함 속에서 박 대표의 메뉴 개발 노력이 성과를 낸 것이다. 막다른 길에서 만난 절박함과 성실함으로 일군 성공이었다. 개업 후 2년이 지났을 무렵엔 내 집까지 장만했다.

장사가 잘 되는 걸 보고 건물주는 욕심을 부렸다. 점포가 세든 건물을 비싼 가격에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비싸게 건물을 매입한 새 주인은 임차료를 4배나 올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땅을 사서 건물을 지었다. 다행이 그동안 번 돈이 있었다. 새 건물로 돼지국밥집을 이전했다. 체인점도 몇 곳 내줬다. 그러나 체인 사업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체인점을 하시는 분들이 자꾸 성공하지 못 하더라고요. 역시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체인 사업은 제가 할 일이 아니었어요. 체인점이 실패할 때마다 업주 분들이 투자했던 돈을 다시 돌려주다보니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들어졌습니다.”

인건비, 고기를 비롯한 재료비, 그리고 제 관리비용이 엄청 올라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무엇보다 반찬을 다양하게 많이 내놓아야 하는 국밥의 업종 특성상 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이는 모든 한식 업종의 문제점이기도 했다. 점점 수익률이 낮아지자 2011년에 돼지국밥집을 접었다.



탐색 끝에 아귀 찍고 소바로 턴!

메뉴개발 전문가가 된 박 대표는 여러 메뉴의 레시피를 확보했다. 그 중 가장 자신 있었던 아귀탕과 찜을 파는 아귀 전문점을 차렸다. 음식의 맛과 질은 만족스러웠다. 지금도 예전 아귀탕이 먹고 싶다는 손님이 있을 정도다. 장사도 비교적 잘 됐다.

그러나 고비용 저수익 구조가 문제였다. 하루에 2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야 유지가 될 수 있었는데 150만 원 정도에 머물렀던 것. 식당의 규모나 인력을 풀가동해도 추가 매출을 올리는 건 쉽지 않았다. 결국 4년 만에 돼지국밥 집에 이어 아귀 전문점도 문을 닫았다. 적지 않은 열정을 쏟아 부었지만 성장에 한계가 있는 아이템이었다. 차라리 그 정도 정성과 노력을 다른 곳에 들이면 금세 성공할 것 같았다. 그런 아이템이 없는지 탐색해봤다.

부부는 2년간 전국 식당을 순례하면서 적당한 아이템을 물색했다. 더불어 다른 식당들의 운영이나 조리법 등도 보고 배웠다. 부부의 예민했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은 소바였다. 마침 광주의 칡냉면 시장도 주춤하던 시기여서 칡냉면 이후를 끌고 갈 면식(麵食) 아이템으로 소바는 제격이었다. 더구나 돼지국밥과 아귀찜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시켜줄만한 메뉴였다. 조리도 간편하고 번잡스런 찬류나 서빙도 필요 없었다. 게다가 소바는 건강 트렌드를 이끄는 아이템이 아닌가?

다만 조리법을 익히기 어려웠다. 여러 곳을 다니며 맛을 보고 외식 관련 교수들을 찾아가서 자문도 구했다. 나중에는 면식 전문가에게 조리법을 유료로 배웠다. 2017년 새해가 밝아오자 부부는 광주 봉선동에 <소바우>라는 간판을 걸고 소바집을 차렸다. 그곳은 광주에서 가장 잘 나가는 메밀 전문점이 있는 곳이었다. ‘기왕이면 센 놈과 붙어보자’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일단 처음 시작은 작게 시도했다. 소바와 서로 상보적 관계의 메뉴인 돈가스를 접목시켰다. 33㎡(10평) 남짓한 공간에 5개의 테이블을 놓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라 신중하게 시도한 것이다. 탐색전을 치러보고 반응이 괜찮으면 나중에 큰 규모로 확대할 생각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부부의 걱정과 달리 고객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회전률도 높았고 수익성도 만족스러웠다. 장소가 좁아 아내인 박 대표가 고생이 많았다. 남편 전 대표는 메뉴구성이나 기획을 했고 그것을 직접 몸으로 실행하는 건 아내 박 대표 몫이었다.









편안한 분위기와 수준 높은 음식으로 ‘2층 단점’ 상쇄

봉선동에서 1년 동안 소바와 돈가스 전문점을 하다가 지난 2018년 2월에 현 위치로 이전했다. 마침 어느 할머니가 25년 동안 정성으로 꾸려온 돈가스 전문점이 나와 입점하게 된 것이다. 예전 경양식 집 스타일의 빈티지풍 인테리어가 손님들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가게다. 부부는 그런 분위기를 계속 살려나가기로 했다. 옥호도 박 대표의 이름을 딴 <미미당>으로 바꾸고 친근하고 감성적인 콘셉트를 유지했다. 점포 이전 후에도 이웃들의 뜨거운 사랑은 식지 않았다. 부부는 그들의 사랑에 늘 고맙다.

처음 광주에 와서 자리를 잡은 풍암동과 봉선동에서는 지역 주민들과 인간적 교유가 활발했다. 장애를 가진 전 대표를 편견 없이 대해줬다. 물론 지역에서 전 대표가 펼쳤던 헌신적인 봉사활동에 기인한 결과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정다운 이웃이자 충성스러운 고객들이었다.

풍암동과 봉선동 이웃들의 성원도 있었지만 음식의 질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였다. 일본 정통식을 지향한 돈가스 재료는 인근 도축장에서 구매한 신선한 한돈 등심이다. 박 대표가 다년간 실험 끝에 완성해 인근에서는 최고의 돈가스임을 자부한다. 소바 역시 육수와 면을 광주시민들 입맛에 최적화 시켰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콘셉트, 실력, 운,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잘 맞는 느낌입니다. 한식에 비해 버리는 음식쓰레기 양이 적고, 반찬을 덜 만들어도 되니 그만큼 인력도 덜 필요합니다. 가게가 2층임에도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시네요.“



동료 장애인 미술가 돕기 어느새 18년째

전 대표가 장애인 봉사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01년부터였다. 돼지국밥집이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리던 무렵이었다. 그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필생의 사업이었다. 신경림의 시 ‘겨울밤’에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전 대표의 심정이 그랬다. 자신이 장애를 지닌 채 평생 살아왔기에 장애인의 어려움을 속속들이 잘 안다. 사회 경제적 약자로서 당장의 생존과 싸워야 하는 절박한 처지의 장애인이 적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돕는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국가나 개인이 장애인을 지원할 때는 불쌍해서 도와준다는 시혜적 관점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도움은 오히려 장애인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것. 그들의 자존감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두 번의 위로나 금전적 도움만 주고 마는 것은 그들에겐 동족방뇨다. 시간을 두고 고민을 들어주면서 그들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줄 누군가가 절실하다.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국가는 아직 그들에게서 멀리 있다. 이런 현실인식이 전 대표를 나서게 했다.

전 대표는 현재 복지협의회 풍암동 위원장과 광주 장애인미술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아침에 식당으로 출근해 일하다가 오후 2, 3시면 슬그머니 퇴근한다. 장애인 복지단체와 장애 미술인들을 돕는 단체로 출근하기 위해서다. 장애를 가진 미술가들의 현실은 무척 열악하다. 작품 활동도 힘든데 완성한 작품을 전시하거나 판매하는 건 더 힘들다. 그들이 작품 활동과 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전 대표의 일이다. 현재 회원이 30명 정도 된다. 대부분 국전에서 입선한 작가들이다. 전 대표도 풍경 정물 인물 등을 유화로 그려내는 화가다. 그들과 더불어 인생과 예술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제가 어렸을 적엔 장애인이 집 밖으로 나다니는 것조차 손가락질을 받았지요. 요즘 장애인에 대한 인권의식이 개선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비장애인과 동등한 출발선상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점은 여전합니다. 결과의 평등까지는 아니어도 기회의 평등은 누려야 합니다. 제가 오후에 장애인미술협회로 출근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저를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아내가 늘 고맙고 미안할 뿐이지요.”



맛 좋은 식당, 맛 좋은 세상을 내 손으로

전 대표의 봉사활동은 아내 박 대표의 헌신적 내조가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다. 지금은 친정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지만 첫딸을 낳아 기를 때까지도 왕래가 없던 시절을 살았다. 친정집을 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 닥쳐올 어떤 역경도 극복할 자신은 있었다. 체구는 비록 작지만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그녀는 가끔 스스로에게 ‘너 참 대단하다’고 말해준다.

그렇지만 ‘하늘은 왜 나에게 이런 평범치 않은 고난의 운명을 지웠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개신교 신자인 박 대표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어느 날 아침 박씨는 가게 앞에서 비질을 하다가 누군가의 강력한 시선을 느꼈다. 처음에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다음 순간 그게 하느님이란 사실을 깨닫고 박씨는 큰 감동에 빠졌다. 그때 박씨는 일종의 정에 들었던 것이다.

옛날 선승들은 갑자기 어느 순간 깨닫는다. 문을 열다가, 물을 긷다가, 비질을 하다가 벼락처럼 스쳐가는 진리를 본다. 이를 정(定, 삼매)에 든다고 한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 신비체험을 과대포장해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높이려고 한다. 그런 행동은 잘못이지만 평범한 신앙인의 신비체험 그 자체는 매우 소중하다. 박 대표는 이후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매사에 더욱 감사함을 느꼈다. 늘 자신을 바라보실 하느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지만 특히 더 감사한 대상이 있다. 바로 전북 남원의 친정 부모님이다. 식당 하느라 종종걸음 치는 큰딸을 위해 매년 배추 2000포기씩 김치를 담가주신다. 풍암동 국밥집을 할 때부터였으니 벌써 오래 되었다. 그 외에도 질 좋은 식재료 구입 등을 알선해주시기도 하고 식당의 어려움을 앞장서 해결해주신다.

박 대표는 중국어와 본초학에 관심이 많다. 대학시절 중문과 선배에게 영향을 받은 탓이다. 기회가 되면 중국어 학습과 중국 방문을 꼭 실현시킬 예정이다. 학생시절부터 각종 식물의 특성과 쓰임새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 덕분에 메뉴 개발할 때 톡톡히 덕을 보기도 했다. 웬만한 식재료의 맛과 향과 성질을 광범위하게 꿰뚫고 있어서다.

“교단 대신 주방에서 일하고 있지만 제 삶에 만족합니다. 새로운 메뉴를 하나씩 개발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남편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음식 맛도 사는 맛도 더불어 먹을 때 제 맛이 나는 법이지요.”

[ 제 공 : 월간외식경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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